Week 50

고요한 바다 위에 바위섬이 있습니다. 바위섬 입구를 향해 배 한 척이 흰색 천으로 감싼 관을 싣고 다가갑니다. 고립된 섬. 죽음을 상징하는 키 큰 사이프러스 나무들, 유령을 떠올리게 하는 흰색 옷을 입은 인물과 시신을 담은 관은 죽은 자들의 공간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스위스 상징주의 작가 아널드 뵈클린(Arnold Bocklin, 1827~1901)의 작품 ‘죽음의 섬’입니다. 스위스 미술사학자 하인리히 알프레드 슈미드에 따르면, 그림 속 흰옷을 입은 인물은 뵈클린의 후원자 마리 베르나입니다. 결혼 1년 만에 남편과 사별한 베르나는 재혼을 앞두고 뵈클린 작업실을 방문했다가 세상을 떠난 첫 남편을 추모하는 그림을 의뢰했습니다. 바위섬으로 향하는 배에 자기 모습과 남편의 관을 그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아마도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망자가 된 첫 남편을 마음속에서 떠나보내는 상징적인 작별 예식이라 설명합니다. 당시 작품은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독일의 대부분 가정에 복제화가 걸려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라흐마니노프는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교향시를 작곡했고, 히틀러는 그의 작품을 소장했습니다.


왜 많은 이들이 ‘죽음의 섬’에 끌렸을까요? 어둡고 침침한 분위기 속 느껴지는 두려움과 한편으로는 잔잔하면서도 고요하고 평온한 느낌은 죽음과 현재를 동시에 떠올리게 합니다. 개인적인 사연으로 수많은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아널드 뵈클린처럼 많은 철학자는 죽음을 이야기했습니다. 몽테뉴는 전합니다. ‘철학자들은 죽음을 연구하는 데 삶 전체를 바쳤다… 그만큼 죽음에 대한 앎은 삶을 이해하는 방법이다.’

죽음을 생각하면 경건해집니다. 경건한 마음은 현재를 바라보게 합니다. 과거에 얽매였던 나를, 저 멀리 미래로 달려있던 나를 지금으로 돌아오게 합니다. 일상에서 느끼는 작디작은 기쁨이 인생에서 가장 귀한 기쁨으로 만들어주며, 발을 내디뎌 문밖으로 나갈 수 있는 움직임이 소중해집니다. 큰 기대와 계획이 무너져 삶의 의욕이 사라졌더라도 다시 숨을 쉴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예전에는 고통스럽고 어두운 날이 예외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날들이 일상적이며 오히려 아름답고 맑은 날이 예외가 되었다. 나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을 때는 은혜라도 입은 것처럼 기뻐서 펄쩍 뛰고 싶은 정도다. Michel Eyquem de Montaigne]


내가 겪을 수 있는 가장 작은 기쁨의 순간까지도 움켜쥐며 현재를 살아가고 싶다는 몽테뉴처럼 오늘 하루의 소소한 즐거움을 온몸으로 느끼는 하루를 보내고 싶습니다. 누구나 다 겪을 수밖에 없는 죽음을 인생의 결말이 아닌 과정으로 바라보는 연습. 노력은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도록 합니다. 평안하면 망각 속에 숨어버리는 인생의 마지막 과정. 오늘은 잊어버렸던 경건함을 다시금 떠올립니다.

참고 자료: 몽테뉴의 수상록. 몽테뉴 지음. 안해린 편역. 소울 메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