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15

첫 책을 계약했던 날을 기억합니다. 여러 출판사의 연이은 거절 후 마지막 미팅. 기대하면 상처가 덧날까 애써 무덤덤한 척했습니다. 이번에도 아니겠구나 포기하는 순간, ‘우리와 함께하시죠.’ 그날 밤은 침대에 누웠다가 다시 몸을 일으키기를 여러 번. 기쁨과 설렘, 흥분이 가득했습니다. 물론 계약은 책을 만드는 고된 과정을 위한 시작의 문을 열지도 않은, 마치 문고리에 살짝 손만 스친 격이라는 걸 그때는 몰랐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글쓰기는 제게 지친 몸을 뉠 집과 같은 마음을 쉬게 하는 작업입니다. 그 후 계속해서 쓰고 싶다는 열망으로 두 권의 책을 더 펴냈고, 지금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다음 단계가 보이지 않습니다. 열망만 가득하고 보이지 않는 답답함은 조급함을 불렀고, ‘그러게, 왜 안 되는 걸 굳이 하려고 해요. 글을 쓰면 돈 벌 수 있나요. 그 에너지를 경제적인 활동에 쏟는 게 더 낫지 않겠어요?’라는 가까운 이의 말은 아물지 않은 상처에 소금 같았습니다. 잘하지 못하니 안 보이는 거라고 자신을 의심했던 시기에 훅하고 들이닥친 말은 링 위에서 겨우 서 있던 선수를 KO 패 시킨듯했죠.

숨을 고르고 다시 생각하면, 다음 단계를 위해 힘을 내기 충분한 기억이 있습니다. 아주 가끔이지만, 신기하리만큼 ‘나는 재능이 없나 보다’할 때 편지를 받습니다. 요즘처럼 냉정하고 잘하는 사람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잘 읽었다는 독자분들의 메시지는 쓰러진 선수를 다시 세우기 충분했습니다.

마음을 아래 방향으로 끌어내리는 외부의 자극에는 또다시 상처받을까 두려워 부정적인 기억이 먼저 떠오릅니다. 나도 모르게 나를 방어하고자 내가 먼저 좋지 않은 기억을 꺼내 드는 것이겠죠. 위협이 있으면 도망가야 하는 본능이니까요. 부정적인 기억을 마냥 나쁘다고 할 수 없지만 내가 무너질 수 있는 선을 넘으려 할 때는 나를 세울 수 있는 기억을 내가 스스로 꺼내야 합니다. 그렇다고 내가 선택해서 기억을 지울 수는 없겠죠. 기억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여러 기억으로 이루어진 지금의 나를 들여다보며, 책의 여러 목차를 읽어내듯 나를 세울 수 있는 중요한 순간의 기억들을 정리해야겠습니다.